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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마득한 바다에 은하수가 흐르네
    2019년 가을호/🌿문화 2021. 9. 14. 13:29

     

    글 : 김인숙 작가

     

     

    설문대 할망의 품으
    비행기 창 너머로 한라산이 보인다. 산꼭대기에 서서 손을 뻗으면 은하수에 닿는다는 산. 고개만 지켜 들면 제주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 해안으로 흘러내리는 자락 여기저기 오름이 솟아 있다. 사실, 태초에 설문대 할망이 있었다. 잠에서 깬 설문대 할망은 바닷속 흙을 퍼 치마폭에 담았다. 한 폭 두 폭 흙을 부려 놓으니 바다 가운데 땅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제주다. 이때 치마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새어 나온 흙이 오름이 되었고, 마지막 한 무더기 부린 흙은 한라산이 되었다.


    제주 사람들에게 설문대 할망은 그저 할머니가 아니다. 땅의 큰 어미, 대모신이다. 원시성이 살아있는 태초의 여신. 하지만 그 신은 절대자의 엄숙함보다는 여느 할머니 같은 친숙함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지치고 힘들 때면 그 큰 품에 기대어 위안을 얻었다. 토닥토닥 따사롭게. 땅에 내리니, 성큼 설문대 할망의 품이다.

     

    비자림은 과연 깊은 숲이다. 서로 보듬고 기대어 살아온 천년의 숲. 생명의 힘이 평화롭다

     

    천년의 숲, 비자림에 들다
    동쪽으로 달려 천년의 숲 비자림에 든다. 제주 속살 같은 땅. 훅하니 냄새가 먼저 다가온다. 부드러운 듯 알싸한, 비자 열매가 풍기는 냄새다. 비자림은 과연 깊은 숲이다. 오백 살이나 팔백 살쯤 먹은 비자나무는 물론이요, 팽나무, 생달나무, 머귀나무, 후박나무, 말오줌때, 벚나무, 비목, 자귀나무 들이 제 자리를 잡고 묵묵히 섰다. 그 아래로 고사리가 무성한데, 돌무더기 쌓인 곳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인 숨골도 보인다. 빗물을 들이 머금고, 사시사철 고른 바람을 내뿜는 곳. 여기서도 사람들은 치성을 드렸다. 수령 800년 된 비자나무 앞에 모여 해마다 한 차례씩 동제를 지냈다. 설문대 할망이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원초적인 신이라면, 비자림은 땅에 내려와 사람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함께 살아가는 자연신이다.


    이른 아침 비자나무 숲에 그렁그렁 햇살이 그물처럼 걸린다. 바닥에 깔린 것들도, 하늘 향해 솟은 것들도 고루 어루만지며. 어린나무들도 한 해 두 해 지나며 나이를 먹어가겠지. 볕을 향해 가지를 뻗고,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리고, 바위를 만나면 온몸이 뭉개지도록 부둥켜안고 버텨내며…. 그렇게 시간마다 점점 익어가고, 시간마다 점점 썩어가며…. 그렇게 그렇게 서로 보듬고 기대어 살아온 천년의 숲. 생명의 힘이 벅차오르는데, 평화롭다.

     

     

    용눈이 오름에 서니
    억새꽃 하얗게 핀 오름이 둥실하니 하늘과 맞닿았다. 뭉게뭉게 흰 구름에 살랑살랑 바람 부니 마치 억새꽃 잔칫날 같다. 오름에 오르는데 잘디잔 꽃들이 지천이다. 구절초, 산부추꽃, 씀바귀, 제비꽃…. 사계절 꽃들이 지고 또 피어난다. 가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제주에 목련이 피고 벚꽃이 피었다고 호들갑이더니. 여기 와 보니 별일도 아니네. 계절이야 사람들이 구분 지어 놓았을 뿐. 씨앗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기고 그리고 진다.


    끝없는 순환. 순환을 거듭하며 기억도 쌓이겠지. 그 무진장한 기억으로 다음 생을 이어갈 테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자연은 무진장이다. 용눈이 오름에 올라서니 사방에 우수수 오름들이 널려있다. 다랑쉬, 아끈다랑쉬가 지척이고, 높은오름, 좌보미오름에 멀리 지미봉, 일출봉까지 훤하다. 제각각 높이도 생김새도 다르다. 어느 오름엔 소나무가 많고, 어느 오름엔 억새가 무성하다.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등을 내어주는 작은 산. 오름은 마치 곁에 둔 친구 같다.


    제주 출신 화가 강요배가 말했다. 제주 오름에 올라가 보지 못한 사람은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 사람의 삶을 알지 못한다고. 문득 곤밥이 생각난다. 십여 년 전, 제주에 들락거릴 때였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쩌다 옛날이야기가 나왔다.


    “옛날에 어려서 학교 다닐 때는 소풍 갈 때나 곤밥을 먹을 수 있었지예!”
    “맞수다, 촘말로 맛조수다게!!”


    이심전심 서로들 웃는데 나만 모른다. 알고 보니 곤밥은 고운 밥, 흰쌀밥이었다. 곤밥이라니, 얼마나 간절하고 아릿한 말인가. 삼시 세끼 철철 넘치게 먹고 사는 세월이지만, 그때 곤밥 한 그릇만 할까. 그러고 보니 억새꽃 둥실한 오름이 곤밥 수북이 담은 밥사발을 닮았다. 밥이 하늘이요 신이다.

     

     

    와흘리 본향당에서 돌아오다
    그런데 어디 산다는 게 그리 녹록하던가. 척박한 삶에 사람들은 좀 더 가까이 신을 모시기 시작한다. 산이며, 들이며, 숲은 물론 집안 곳곳까지. 팽나무에 당신할망이 깃들고, 동백나무에 삼승할망이 깃들고, 마을 본향당마다 백조 스물여덟 아들딸이 나누어 깃든다. 부엌에는 조왕신, 대문간에는 문전신, 뒷마당에 칠성신, 측간에는 측간신…. 사람과 신이 한데 부대껴 살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신들의 집이 마련됐다. 와흘리 본향당도 귤밭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서정승따님 신위와 백조십일도령 본향 신위를 따로 모셨다. 부부를 저만치 따로 앉힌 사연은 이렇다. 백조도령이 서정승따님 동네로 찾아와 부부 연을 맺었다. 서정승따님은 태기가 들자, 마침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다. 서정승따님은 측간에 가서 돼지털을 하나 뽑아다 그을려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백조도령은 함께 상을 받을 수 없다고 저만치 물러나라 했다. 그래서 한쪽 구석에 서정승따님 신단을 따로 모셨다는 이야기. 하지만 서정승따님의 신목은 지전은 물론이요 알록달록 색동저고리까지 받고 계시다. 당연하다. 본향당은 여자들의 성소였으니까.
    이른 아침, 제물을 마련한 여자가 길을 나선다. 본향당에 괘 모시러 가는 길이다. 그 길에서 누구를 마주쳐도 아는 체하면 안 된다. 할마님 만날 적에는 매사가 조심이다. 할마님 전에 메밥 한 사발과 곤떡 몇 개, 술 한 병 그리고 과일에 생선을 차려 올린다. 그리고 하얀 종이 석 장을 가슴에 대고 부빈다. 어지신 할마님, 제 얘기 좀 들어줍서…. 속에 박혔던 근심 걱정이, 두려움이 흘러나와 하얀 종이에 찍힌다. 이제 괜찮아…. 여자는 그 종이를 신목에 걸어두고 돌아간다. 어느새 어둑해지고, 나도 이제 돌아가는 길. 노래를 듣는다. 제주 가수 강아솔이 부르는 노래, 〈엄마〉다.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엄마는 늘 염려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다
    귤을 보내니 맛있게 먹거라
    엄마는 내게 늘 말씀하셨지

     


    밤하늘을 날아오르니 저 아래 까마득한 바다에 은하수가 흐르는 듯하다.
    고깃배가 밝힌 등불들. 그래, 세상은 조금 슬퍼서 또 아름다운 거야.

     

    누구에게나 등을 내주는 오름은 마치 곁에 둔 친구 같다.

     

     

     

     

    김인숙 작가는 다리가 튼튼하고 가슴도 뜨거워서 떠돌아 댕기길 좋아하고, 가끔 글 품도 판다. 《제주의 빛 김만덕》, 《랄랄랄 진관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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